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금성 전투 (문단 편집) ==== 예비대 전환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대대OP.png|width=100%]]}}} || || 제3사단 금성전투 상황도[* 사진 출처: 금성전투, 국방부, 138p] || 수색중대가 중공군을 만나기 이전, 제2군단은 군단작명 제6호로써 각 사단으로 하여금 금성천 남단에 제2의 방어선를 편성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군단이 지정한 방어선은 각 사단이 담당하기에는 매우 큰 정면인지라 군단은 작지 제62호로써 군단 예비대인 제5사단 제27연대를 제5사단의 우일선인 제35연대 제1대대와 제18연대의 간격 사이로 투입하여 사단의 광정면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군단이 제27연대를 투입했을 시기에는 이미 제5사단도 혼전 속에 있었으므로 해당 명령문은 구령으로써 동일 14시부로 수정되었으니 원래 투입하기로 하였던 제27연대는 수정명령으로 인해 움직이지 않게되었고 이에 따라 제35연대 제1대대는 광정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채 격전을 치르게 되었다. 바로 이때 제1대대와의 연계를 유지하려 한 제3사단 제18연대는 신진지를 점령하고 곧이어 몰려오는 중공군을 상대로 격전을 치르고 있었다. 이때 연대는 중공군에게 중과부적으로 점차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으며 결국 819고지까지 밀려나 이후 사단장의 승인하에 철수하게 되어 제5사단과 협조를 유지한채 백암산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연대는 5시 30분에 백암산에서 주둔중인 제23연대와 연계했고 이와동시, 즉각 급편방어에 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백암산으로 철수한 3사단 각 부대들은 제대로 된 방어진지 연결도 못했고 또 지휘관의 방어계획도 서로 맞지 않는지라 결국 중공군이 공격한지 단 30분만에 백암산을 피탈 당하고 후퇴하게 된다.] 한편 3사단 제22연대는 지난 14일 21시에 신진지인 666고지-723고지를 폭우를 뚫고 진입하여 신진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중에 중공군 약 2개 대대가 연대 정면으로 출현해 맹렬히 공격해 왔고 그 결과 사격점호도 제대로 차지하지 못한 제22연대는 오전 6시 30분 기준, 후퇴하여 어두은리에 위치한 진지에서 남쪽 6km 지점에 집결하고 역습을 노리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제23연대는 사단장의 구령명령으로써 백암산의 새로운 저지진지를 방어하기 위하여 지난 14일 21시에 집결지인 동막동에서 출발했고 이 과정에서 병력수습을 다 하지 못한 제2대대는 행군이 늦어진 관계로 24시에 본대를 뒤따랐다. 그리하여 마침내 백암산에 도착한 연대는 백암산을 중심으로하여 오전 6시에 제1대대를 962고지로부터 서남 1km에 이르는 능선에, 제2대대는 103번 도로의 좌우측 능선에, 제3대대는 백암산 정상에 각각 배치함으로써 사주방어에 임하였다. 그러나 8시 30분 쯤 중공군이 대거 출현함으로 인하여 백암산 방어진지는 단 30분만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이후 제1,2대대는 백암동으로 철수했고 제3대대는 고둔리에 철수해 병력을 수습하였다. 이렇게 백암산에 배치한 부대가 무너졌을 시기, 기세등등하게 공세를 가해왔던 중공군들도 점차 한계에 직면했는데 이중 특히 백암산에 도달한 중공군은 신장된 보급로와 하천 그리고 폭우에 모두 노출된 까닭인지라 보급을 거의 추진하지 못하였다. 이는 다시말해 중공군의 전투력이 저하되어 있고 1일 1식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밀려난 제2군단이 반격하기에는 딱 알맞는 시기였다. 따라서 제2군단 사령부는 화천에 있던 제11사단을 제6사단 작전지구로 투입시켜 6사단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이후 군단은 제7사단을 미 제9군단으로부터 배속받아 군단 예비대로 두었으며 이어 군단장 정일권 중장은 7월 15일 오후 3시부로 군단작명 제6호를 하달하여 제3사단을 제외한 각 사단들에게 반격을 준비하란 명령을 내리고 제3사단에게는 군단의 예비대가 되어 동시에 제2방어선을 차지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이에 사단장은 작지 64호를 다음과 같이 하달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사단은 군단 예비가 되어 제2방어선을 확보하려 함. >2. 제18연대는 996고지-무명고지(989고지 서북쪽 0.5km)간을 12.00까지 확보하라. >3. 제22연대는 895고지-534고지-645고지간을 12.00까지 확보하라. >4. 제23연대는 758고지-913고지-859고지간을 18.00까지 확보하라 이로써 중공군의 공격을 무자비하게 받았던 사단의 전투정면은 우측의 제5사단과 좌익의 제8사단이 각각 인수했고 사단은 7월 17일까지 재편성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단은 중공군 제60군의 공격으로 말미암아 9km에 이르는 지형으로 물러났고 그동안 공세를 가했던 중공군에게 약 5,000명의 손실을 내게 하였으며 사단또한 마찬가지로 대략 15%의 사상자와 많은 장비의 손실을 입었다. 7월 15일 19시를 전후하여 사단 각 연대는 집결지를 향해 출발해 다음날 오전 3시에 제2방어선인 저지진지(작지 64호에 의한 것)를 인수했고 그곳에서 사단CP를 사방거리 북쪽 2km에 두고 제18연대는 996고지를 중심으로 하여 우일선에 제1대대를, 중앙에 제3대대를, 그리고 좌일선은 제2대대를 각각 배치함으로써 주봉을 방어하게 하였으며 제23연대는 사단 우일선으로 제2대대를 758고지-1048고지간에 배치, 제3대대에게는 제2대대와 연계하도록 하여 859고지에 이르는 선을 방어하게 하고 마지막 제3대대는 예비대로 지정해 우측방을 경계하도록 하였다. 한편, 제22연대는 위 연대와 연계하도록 하기 위하여 제1대대를 우일선으로 지정했고 이와 동시에 제1대대로 하여금 895고지-무명고지를 방어하도록 했으며 좌일선은 제2대대로 지정해 645고지에 이르는 능선을 방어하도록 했다. 또 제3대대에게는 연대 예비대로 지정해 배치지를 어두은리로 하여 연대의 배치 편성을 끝마쳤다. 이리하여 배치를 모두 끝마치자 사단장은 공병 1개 소대를 각 연대들에게 지원하면서 진지구축에 주력함과 동시에 부대정비에 임하도록 하였다. 이후 사단에게 배속되었던 제72포병대대가 배속이 해제되어 반격제대인 제7사단으로 가버렸고 이에 사단장 임부택 소장은 이날 예비대를 확보하고자 제23연대를 고토은리로 빼내어 사단예비대로 공치하는 한편, 제18연대에게 제23연대의 작전구역을 인수하도록 함으로써(15시) 마침내 2일간의 혈전을 끝을 내고 7월 23일, 다시 미 제8군 예비대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 후, 사단은 창촌으로 복귀한 뒤 그곳에서 훈련과 부대정비에 임하다가 7월 27일, 휴전을 맞이하였다. >부대는(제23연대) 특히 13일의 철수 작전 이후, 분산된 병력을 수집하여 재편성을 거의 완료하고 질서가 회복될 무렵. 15.00 사단작명에 의거 방어임무를 제18연대에게 인계하고 부대정비를 위하여 고토은리에 집결하려 하였으나 제1대대는 사방거리에 제2대대는(CT842 281) 지점에 제3대대는 하방골 연대CP 앞(CT849 297)에 각각 위치함. >---- >第三師團金城川地區战斗, 33p 이 전투에서 입은 3사단의 피해와 전과는 다음과 같다.[* 출처: 第三師團金城川地區战斗, 38p] '''손실''' || 구분 || 전사 || 부상 || 실종 || || 18연대 || 16 || 86 || 150 || || 22연대 || 22 || 189 || 287 || || 23연대 || 71 || 105 || 199 || || 기타 || 8 || 42 || - || '''전과''' || 구분 || 사살 || 추정살상 || 포로 || || 18연대 || 200 || 800 || 1 || || 22연대 || 1,150 || 2,100 || 2 || || 23연대 || 1,000 || 1,800 || || 금성전투 당시 사단은 대대급 이상의 피해를 입었으며 그중 실종자가 절반을 넘기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